'미(美)의 상징'으로 통하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실존 인물 중 역사에서 가장 유명인물 중에 한명인데요,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팡세'라는 책을 통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프툴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로 빼어난 미모로 로마 장군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한 '요부'로 알려져왔는데요, 그러나 사실은 탁월한 정치감각과 국가관리능력을 가진 여왕이었다고 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18세 때 왕위에 올라 기원전 51년부터 30년까지 2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나라를 훌륭하게 이끌었습니다. 이집트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대강국으로 만든 천재 지략가로 이집트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의 운명을 뒤흔든 인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2022년 새해 1월 1일 방송되는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이야기 로마 영웅들과 클레오파트라, 악티움 해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칠 예정이라고 합니다.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었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죽음과 이후 펼쳐진 후계 문제 때문에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는데요, 당시 카이사르의 후계자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아들도, 카이사르와 함께 전장을 누빈 안토니우스도 아닌 18살 소년 옥타비아누스였다고 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카이사리온이 후계자가 될 것을 확신했는데요, 하지만 유언장에는 당시 18세에 불과한 카이사르의 누나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라고 써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배신감에 충격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성대하게 맞이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배짱에 반했고둘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카이사르처럼 이집트에 눌러앉았던 안토니우스는 전쟁은 안 하고 파티를 즐겼습니다.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쌍둥이를 낳으며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안토니우스는 쟁취한 전리품들을 로마로 보내지 않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진행하는 등, 여론을 의식하지 않은 행동으로 로마 민심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 옥타비아누스의 자극적인 흑색 선전으로 인해 명예가 땅으로 떨어지게 되고 이때 안토니우스의 정치 인생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옥타비아누스가 멀쩡히 살아있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한 것입니다. 안토니우스 유언장에는 죽어서도 이집트에 묻히고 싶다는 말이 적혀있어 세간의 비난을 샀습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있던 모든 권한을 회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BC31년 9월2일 악티움(그리스 서북부 프레베자)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악티움 해전에서는 안토니아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이 우세했지만 안토니아의 장군이었던 퀸투스의 투항, 전염병, 식량 보급 차단등의 전술등에 의해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자신의 배를 칼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소문이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죽음을 앞둔 안토니우스를 보고 달려왔습니다. 겨우 숨이 붙어있었던 안토니우스는 죽어가면서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목숨을 부지하라고 말하고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요,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 끌려가 포로가 되어 모욕을 당하느니 독사에 물려 자살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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