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 명곡 '사랑이야' 탄생 비화 "내가 감옥에서 썼던 곡이다"
개성적이면서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 송창식은 자기의 곡 대부분을 직접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입니다.
그는 한국 가요사의 굵은 획을 그은 천재로 남을 가수이자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한평생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그는 슬퍼도 웃으면서 희로애락 등 모든 감정을 웃음으로 표현하는 경지가 되었습니다.
1947년 2월 22일 생으로 올해 나이 77세인 송창식은 어린 시절부터 모차르트라고 불릴 만큼
음악 천재로 소문났다고 합니다.
성악가를 꿈꿨던 송창식은 중3 때 경기 음악 콩쿠르에서 성악 부문 1등을 하며 놀라운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어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에 수석 입학 하였지만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는
어려운 형편으로 개인 레슨비를 낼 수 없어, 결국 성악을 포기하고 학교를 중퇴했습니다.
당시 죽을 만큼 괴로웠다는 송창식은 가출해서 떠돌이 같은 생활을 하며 끝없는 방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역에서 노숙자로 추운 겨울을 지내기도 했다는 송창식은 노숙자 생활을
2년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대학생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놀고 있었는데 한 대학생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때 난생처음 본 기타라는 악기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학생은 바로 '가는 세월'을 부른 가수 서유석이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기타를 치며 독학했다고 합니다.
이후 여기저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식사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쎄시봉에서 MC를 맡았던 이상벽에게
눈에 띠어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송창식의 노래를 들었던 조영남은 아주 남루한 거지 같은 차림을 하고 나타났는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입이 딱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어 마침내 노래의 신선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송창식은 기타를 치며 가곡을 불렀습니다.
자기 신세와도 같은 노래의 제목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쎄시봉
생활을 하던 중 경희대 초대 학장님의 아들이며 전설적인 민족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인 윤형주와 불멸의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71년 '창 밖에는 비 오고요'를 발표하며 솔로 가수로 전향하게 됩니다. 1974년에는
'피리 부는 사나이', 1975년 '고래 사냥' '왜 불러'등을 부르며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송창식은 1978년부터 3년 연속해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는 등 가요계 정상에 우뚝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인기와 더불어 끊이지 않는 구설수와 염문설로 화제가 되가도 했던 송창식은 1977년
고교 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 쌍둥이 동생 한성숙과 결혼하였습니다.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째 아들 송결은 친자식이고 나머지 두 남매는 입양하였습니다. 송창식 감옥 일화 송창식의 명곡 중 하나인 '사랑이야'는 1977년 송창식이 향군법 위반으로 감옥에 있을 때 면회 온 아내 한성숙 씨에게 곡의 마무리를 맡기면서 완성됐다고 합니다.
송창식은 2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에서 '사랑이야' 탄생 비하인들 밝혀 놀라게 했습니다. 송창식 특집으로 펼쳐진 가운데 가수 환희는 송창식의 '사랑이야'를 선곡했습니다.
송창식은 이 노래에 대해 "가사를 감옥에 있을 때 썼다. 향토 예비군법에 걸려서 감옥에 간 적이 있는데 그 안에서 썼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썼지만 실제는 몸에 흐르는 명상의 단계를 노래한 거였다. 바깥에 면회 온 아내에게 이걸 불러주고 집에 가서 정리를 해달라고 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송창식은 당시 직접 스튜디오를 세워 '사랑이야'를 녹음했을 정도로 공을 많이 들였다."라고 합니다.